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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18
[역사로 알아보는 약 이야기] 유전자 치료제
2022.11.18 URL복사

유전자 치료제 개발은 그 역사가 짧아 아직까지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한데요. 오늘 ‘역사로 알아보는 약 이야기’에서는 세대를 이어 고통을 주는 유전병에 얽힌 역사 이야기와 유전의 비밀, DNA를 밝힌 역사까지 한눈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왕가의 병’으로 불리는 빅토리아 여왕의 ‘혈우병’ 유전

1837년~1901년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 1819-1901)이 통치하던 시절, 영국은 산업자본주의와 제국주의 국가로 대영제국이라 불리며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태평성대를 누리며 앨버트공과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여왕에게도 가슴 아픈 고민은 있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과 남편 앨버트공 사이에 자녀가 아홉 있었는데 네 명의 아들 중 한 명이 혈우병으로 죽게 된 것입니다. 혈우병은 유전자 돌연변이에 의한 유전병인데요. 혈액 속에서 피를 굳게 만드는 응고인자가 부족해 나타나는 질환입니다. 가벼운 부상에도 쉽게 피가 나고, 지혈도 잘 되지 않아 심할 경우는 사망에 이르기도 합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혈우병 유전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의 혈우병 유전은 다른 왕가와 결혼한 딸과 손녀들을 통해 널리 독일, 스페인, 러시아 등 여러 유럽 왕가로 이어졌고, 전 세계는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됐죠.

ㅁ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과 혈우병

빅토리아 여왕의 비극은 손녀 알렉산드라(Alexandra Fyodorovna, 1872-1918)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그녀 역시 혈우병 보인자였기 때문이죠. 

빅토리아 여왕의 둘째 딸 메리는 당시 유럽 왕실 관례에 따라 독일 왕실과 정략결혼을 합니다. 이후 딸 알릭스를 러시아 황태자 니콜라이 2세(Nicholas II, 1868~1918)와 결혼시키죠. 결혼 후 알릭스는 알렉산드라 황후라 불리며 딸 넷을 낳고, 왕위를 물려받을 아들 황태자 알렉세이(Alexei, 1904~1918)를 낳게 됩니다.

황태자가 태어나던 날 탯줄을 자른 곳에선 피가 멈추지 않았습니다. 황태자에게도 혈우병이 유전된 것입니다. 황태자의 혈우병이 세상에 알려지면 왕권을 물려받을 수 없다는 생각에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황태자가 타박상으로 피를 흘리는 사고가 일어납니다. 황태자의 혈우병을 왕실 의원에게조차 알리지 않았던 황제와 황후는 당시 사이비 예언자로 악명 높았던 그레고리 라스푸틴(Grigori Yefimovich Rasputin, 1869-1916)을 궁에 들이게 됩니다. 그가 행한 조치는 지혈 정도였지만, 이상하게도 라스푸틴이 시술을 거행할 때면 알렉세이가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우연히 일어난 이 기적 때문에 라스푸틴은 황제와 황우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게 됩니다. 

하지만, 라스푸틴은 이 점을 이용해 각종 부정부패를 저지릅니다. 황제가 제1차 세계대전에 직접 참전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라스푸틴의 횡포는 더욱 심해졌죠.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를 정도로 심한 횡포를 벌이던 라스푸틴은 결국 1916년 말, 황제의 조카 유스포프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죽음만으로 제국이 다시 힘을 얻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참다못한 혁명군은 임시정부를 세우고 황태자 알렉세이를 내세워 전제군주제 대신 입헌군주제로 바꾸자는 제안을 하죠. 하지만 황제는 이를 거부합니다. 이렇게 입헌군주제가 무산되자, 1918년 니콜라이 2세 황제와 일가는 급진적인 레닌의 볼셰비키 당원들의 총에 처형당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죠.  러시아의 이런 불안정한 상황은 전 세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정세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ㅁ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저주? ‘합스부르크 립’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13세기부터 20세기까지, 6세기 동안 유럽 대부분의 지역을 지배할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숨기고 싶은 비밀이 한 가지 있었죠. 바로 ‘왕가의 저주’라고 불린 ‘합스부르크 립(Habsburger Unterlippe)’ 이었습니다. 합스부르크 립은 일명 주걱턱이라고도 불리는 하악전돌증으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사람들은 합스부르크 립으로 인해 길게 돌출된 아래턱을 가지고 태어나 평생 극심한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렸다고 해요. 

이는 거듭된 근친혼으로 인한 유전질환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실제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 200년 동안 맺은 11차례의 결혼 가운데 9쌍이 사촌 이내의 근친 사이였다고 합니다. 과거 중세 유럽에서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근친혼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계속된 근친혼으로 기형의 유전자가 몸속에 고정돼 대대손손 이어지는 비극적인 상황을 초래한 것입니다. 

특히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왕이었던 카를로스 2세(Charles II, 1661-1700)는 가장 합스부르크 립으로 가장 큰 고통을 겪은 사람으로 기록됩니다. 태어날 때부터 병치레가 많았던 카를로스 2세는 입을 다물고 있어도 침이 흐를 정도로 심한 주걱턱을 가져 음식을 씹기도 힘들었으며, 만성 위장장애와 구루병, 발기부전 등 각종 질환을 앓았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자식을 얻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합스부르크 왕가는 막을 내리게 되었죠.

한 사제의 열정으로 발견한 ‘유전법칙’

혈우병을 비롯한 유전자 치료제의 시작은 바로 유전법칙에서 시작합니다. 

유전법칙을 발견한 그레고어 멘델(Gregor Mendel, 1822~1884)은 놀랍게도 과학자가 아닌 사제였습니다. 19세기 오스트리아 시골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자연스레 농사를 접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자연과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17살 무렵 아버지의 부상으로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자 경제적 책임을 지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갑니다.

사제가 된 후에도 멘델은 대학에 다니며 열심히 자연과학을 공부합니다. 찰스 다윈이 발표한 「종의 기원」에 흥미를 느낀 멘델은 완두콩을 이용해 실험을 시작합니다. 실은 이 실험에도 숨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원래 멘델은 쥐를 이용한 실험을 하려고 했으나, 수도원 측의 반대로 완두콩으로 실험을 대체하게 된 것입니다. 

다행히 완두콩은 유전자 실험을 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고 있었습니다. 완두콩은 형질이 뚜렷했기 때문이죠. 형질이란 생물을 구분할 때 기준이 되는 모든 형태적 특징을 말합니다. 동그랗고 매끈한 콩, 쭈글쭈글한 콩, 초록색 콩, 노란색 콩 등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멘델은 완두콩의 형질을 줄기의 길이, 씨의 모양과 색, 콩깍지 모양과 색, 씨껍질의 모양과 색 이렇게 7가지로 나누어 수도원 밭에 심었습니다. 그 결과, 3가지 유전법칙을 발견합니다. 첫 번째는 우성(잘 드러나는 형질)과 열성(잘 드러나지 않는 형질)을 교배하면 자손 1세대에서 우성만 나오는 우열의 법칙입니다. 두 번째는 이렇게 나온 자손 1세대를 자가수분시키면 우성과 열성이 3:1로 나오는 분리의 법칙입니다. 세 번째는 한 쌍의 서로 다른 형질끼리는 섞이지 않고 분리돼 서로 영향을 미치지 않다는 독립의 법칙입니다.

멘델은 이 유전법칙을 논문으로 발표하지만, 당대 학계에서 그리 환영받지 못합니다. 1884년 그가 세상을 떠나고 1900년대에 이르러서야 네덜란드 식물학자 휴고 드 브리스(Hugo Marie de Vries, 1848~1935)가 유전법칙 논문을 발견하면서 멘델의 유전법칙은 재평가됐고, 수많은 학자로부터 그 가치를 인정받으며 현대 유전학의 근간이 됐습니다.

‘다윈’과 ‘멘델’을 의심한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미국 생물학자인 토머스 헌트 모건(Thomas Hunt Morgan, 1866-1945)은 다윈과 멘델의 연구 결과를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모건은 초파리를 이용한 실험을 시작하죠. 초파리는 염색체가 4쌍이고, 번식력이 강해 1년에 최소 24세대를 관찰할 수 있고, 유전자 연구에 매우 유리했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처음에는 돌연변이 초파리를 만들어낼 수 없어 실험다운 실험을 시작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1910년 모건은 붉은 눈을 가진 초파리들 사이에서 흰색 눈을 가진 수컷 초파리를 발견합니다. 붉은 눈을 가진 암컷 초파리와 교배한 결과 1세대에서 멘델이 발견한 우열의 법칙에 따라 모두 붉은 눈을 가진 초파리가 태어났습니다. 잡종 2세대에서는 약간의 오차는 있지만 붉은 눈 초파리 3,470마리, 흰 눈 초파리 782마리가 멘델의 분리의 법칙에 따라 3:1 비율로 태어났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초파리에 엑스(X)선을 쏘이자 돌연변이 유전자가 생겼는데요. 이렇게 돌연변이로 생긴 형질들은 생존에 부적합한 환경이면 자연스럽게 도태되고, 생존에 적합한 환경이면 새로운 형질로 자리 잡는다는 사실도 확인함으로써 모건은 다윈이 주장한 자연선택설까지 입증한 셈이 되었습니다.

결정적으로 모건은 초파리 연구를 통해 X염색체에 돌연변이가 발생하면 혈우병 같은 유전병이 생긴다는 사실을 증명해냈습니다. 수컷은 XY염색체를 갖고 있어 XX염색체를 가진 암컷보다 X염색체 돌연변이에 더 취약하다는 점을 밝혀낸 것입니다. 암컷의 경우 X염색체에 돌연변이가 생겨도 정상 X염색체에 가려지기 때문에 보인자가 될 뿐 유전병 발생은 피할 수 있기 때문이죠.

모건은 이제까지의 연구 결과를 종합해 유전자는 우리 몸을 이루는 세포의 핵 속에 있으며, 염색체에 일렬로 배열돼 있다는 유전자설을 발표합니다. 이후 성염색체와 상염색체 돌연변이의 유전자 지도까지 작성합니다. 이후, 1933년 이 모든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유전공학의 탄생과 가려진 공로자, 로절린드 엘시 프랭클린

모건의 초파리 실험 이후 염색체와 관련해 수많은 연구가 이뤄지면서 DNA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납니다. 이후, DNA가 물질의 형태로 세포 내 담겨있는 유전 정보임이 밝혀지게 됐죠.

이후 1950년대 이르러 전 세계는 유전의 핵심인 DNA구조를 밝히기 위해 보이지 않는 전쟁을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엑스(X)선 결정학 전문가였던 영국의 여성 생물물리학자 로절린드 엘시 프랭클린(Rosalind Elsie Franklin, 1922~1958)에 의해 DNA의 베일이 벗겨집니다. 

1952년, 프랭클린은 송아지 흉선에서 얻은 시료 최초의 DNA 엑스(X)선 사진을 촬영했습니다. 이 사진은 실험실 동료였던 모리스 윈킨스에 의해 왓슨과 크릭에게 유출되는데요.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진이 단서가 돼 DNA의 이중구조 나선이 밝혀지게 됩니다. 왓슨과 크릭은 1953년 과학저널 「네이처」에 DNA의 이중나선 구조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고,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62년 윌킨스와 함께 12월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이때 플랭크린이 함께 수상대에 오르지 못한 이유는 1958년 이미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였기 때문입니다. DNA 발견에 가장 큰 공헌을 하고도 수상의 영광은 누리지 못한 것이죠. 하지만 플랭클린의 업적은 훗날 많은 후배 과학자들에 의해 재조명되면서 분자생물학의 기틀을 다진 천재 과학자로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희귀질환자들의 희망 ‘유전자 치료제’

지금 전 세계 제약·바이오 기업들은 희귀질환 치료제 개발에 힘쓰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그 이유는 아직 원인을 알지 못하거나 유전병으로 추정되는 희귀질환자들을 위해서입니다.

유전병은 유전자나 염색체같이 유전과 관련된 인자가 원인이 돼 일어나는 질환입니다. 특히 희귀질환은 단일 유전자의 결함(돌연변이)으로 인해 발생하기 때문에 유전자 치료 요법이 가장 강력한 치료법이죠.

유전자 치료법에는 먼저,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정상 유전자를 환자에게 직접 넣는 체내 유전자 치료가 있습니다. 이때 DNA를 그대로 주입하기도 하지만, 그러면 원하는 부위에 원하는 양을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운반체(벡터·Vector)’를 이용합니다. 벡터로는 주로 바이러스가 쓰입니다. 체외 유전자 치료는 환자의 혈액이나 장기, 골수 등에서 세포를 채취해 병을 유발하는 DNA를 고친 후, 다시 환자의 몸에 넣어 몸의 기능이 정상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방식입니다. 체내 유전자 치료에 비해 안정성이 높지만, 수많은 세포의 DNA를 일일이 조작하는 게 어려워 비용이 많이 듭니다. 이외에는 유전자 가위 기술이 있습니다. 이것은 세포 내 유전 정보 중 원하는 위치를 잘라내 유전자를 교정하는 기술입니다.

유전자 치료제의 개발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단계로 아직 개발이 완료된 치료제는 혈우병, 진행성망막변성, 척수성근육위축증, 혈액암 등 극소수에 불과한 상황입니다. 지속적인 투자와 연구개발이 필요한 이유죠.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기술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면서 미래에는 더 많은 유전병과 만성·난치성 질환의 치료가 가능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지금까지 세대를 이어 고통을 주는 유전병의 역사와 유전의 비밀, DNA를 밝힌 역사까지 알아보았습니다.

오늘 유전자 치료제와 함께한 ‘역사로 알아보는 약 이야기’, 어떠셨나요? 우리 일상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인 약이 인류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더욱 다양한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앞으로도 대웅제약 뉴스룸을 자주 찾아주세요!